SCP-8000

In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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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TimidChild
Rating: 34/34
Created at: Sun Jul 27 2025

PlaguePJP: XXXV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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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 격리 절차

SCP-8000.

SCP-8000은 현재 격리되지 않았다.

설명

SCP-8000은 거대한 점박이물범(Phoca vitulina)을 닮은 뱀 형태 독립체로, 제322기지 내에 거주한다. SCP-8000의 정확한 길이는 불명인데, 이는 대상의 꼬리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값은 최대 150미터에 달한다. SCP-8000은 껑충거리거나 미끄러지거나 헤엄치는 대신 자력으로 비행할 수 있으며, 고체를 그대로 투과할 수 있고, 미래를 예지할 수 있다.

SCP-8000은 지성이 있고 대화할 수 있으며 지능이 매우 높다. 추가로 SCP-8000은 임시 차원문을 뜻대로 생성할 수 있다. 이에 대해 SCP-8000이 외부차원의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 기준 현실까지 이어졌다는 가설이 세워졌다. SCP-8000이 현재 현실에 존재하는 방법이나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작성 시점에서 SCP-8000은 지구에 있는 단 두 생명체 중 하나이다.

폴 레이그 이사관이 제322기지 회의 장소에 불쑥 들어온다. 그는 보고서를 열중해 읽으며 의자로 걸어간다.

레이그

제르, 까놓고 말해서, 네가 뭐라— 누구냐, 넌?

SCP-8000이 책상 반대편에 앉아 있다.

SCP-8000

반갑네, 폴 선생!

레이그

저기— 제레미는… 어?

SCP-8000

오늘은 나와 자네뿐이네. 앉게나. 물지 않으니 걱정 말고.

레이그

지금 되게 혼란스러운데. 너 물범 맞지?

SCP-8000

여기는 무얼 하러 오는 길인가?

레이그

그— 기억이 안 나네. 회의가 있던 것 같은데. 너야말로 여기서 뭐 하는데?

SCP-8000

자네에 대해선 충분히 잘 알고 있네. 그렇게 반응하는 것도 당연하지. 자네가 나에게 솔직하게 군다면 나도 자네에게 솔직하게 답하겠다고 약속하겠네.

레이그

좋아. 음. 그러니까 말하는 길쭉이 물범이다 이거지? 여긴 네 발로 직접 들어왔고?

SCP-8000

그렇다네.

레이그

너 같은 놈들을 잡아다 평생 가둬놓는 게 내 일인데 말이야.

SCP-8000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직접 조사해서 문서화 해두었거든.

SCP-8000이 SCP-8000 문서를 레이그에게 밀어서 건넨다.

레이그

일련번호는 왜 8000이지?

SCP-8000

내가 고른 게 아닐세.

레이그

네가 썼다며.

SCP-8000

그렇지, 하지만 그건 내 손 밖의 일이었다네.

레이그

너 꼬리는 있어?

SCP-8000

그게 가장 신경쓰이나?

레이그

그런 내용을 굳이 적어둔 게 꽤나 특이해서. 모른다면 추측이라도 안 돼?

SCP-8000

나는 내 꼬리를 본 적이 없다네. 증거가 부재하니 확언해 줄 수도 없지.

레이그

네가 저기까지 쭉 기어가고 나면 꼬리가 있나 없나 내가 확인하면 되잖아.

SCP-8000

여보게, 나는 부유하여 다닌다네. 우아하고 기발하게 말일세.

레이그

아 예, 그러시겠죠. 이 사진은 누가 찍었는데?

SCP-8000

바로 자네지. 앞으로 6분 내지는 7분 정도 남았군.

레이그

그건 또 무슨 소리야?

SCP-8000

폴 선생, 오늘 하루를 나와 함께 보내지 않겠는가? 어떤 해답에 도달할지는 아네만, 어찌 되었든 우리는 이 장단에 맞추어 나아가야 하거든.

SCP-8000이 무는 듯한 움직임을 취한다. 턱에 허공이 걸리자, 공간을 꽉 문다. 독립체는 머리를 왼쪽으로 당겨 현재 현실을 찢어낸다.

SCP-8000이 입구를 통과하고 머리를 빼꼼 내밀어 레이그를 바라본다.

SCP-8000

바로 여길세.

레이그

잠깐만.

SCP-8000

옳지, 옳아. '자네가 무얼 보고 날 믿겠나?' 궁금한 건 무엇이든 물어보게. 정직하게 답해주겠네.

SCP-8000이 오른쪽 지느러미를 든다.

SCP-8000

자네가 책상 서랍에 숨겨둔 잡지들에 걸고 맹세하지.

(레이그는 조용히 SCP-8000과 눈을 마주치고, SCP-8000은 도로 윙크를 건넨다.)

레이그

날 죽이지 않을 거야?

SCP-8000

낭비로세.

레이그

먹지도 않을 거고?

SCP-8000

인육을 탐하는 건 한참 오래전에 끊었다네.

레이그

농담이지?

SCP-8000

그래. 아주 예민하군. 자네를 먹을 이유가 어딨겠는가.

레이그

아니면 수백만 년 동안 나를 고문한다든가? 내 눈앞에서 가족을 태워 죽인다거나? 날 수십 수백 번씩 미쳐버리게 한다거나? 뭐 그런 계획은 정말 하나도 없단 말이지?

SCP-8000

기이하리만치 구체적이군.

레이그

대답해.

SCP-8000

쓸데없고 또 난폭할 뿐.

레이그

내가 여기서 뭘 해야 하는 건데?

SCP-8000

폴 선생, 난 그저 당신과 하루를 보내고 싶을 뿐이라네.

레이그

이미 들었어, 그건.

SCP-8000

나는 이제 아주 천천히 이 균열 속으로 들어갈 걸세. 오래 열려있지는 않을 테고, 다시 열려면 무척 골치가 아프다네. 그러니 부디, 피차 수고를 덜 수 있게 협조해주게나. 방금 본 사진을 찍지 않았다가 역설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을 게 아닌가, 폴 선생?

SCP-8000이 차원문에 다시 들어간다. 레이그 이사관은 균열의 가장자리가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본다.

회수 문서 8000.1
2024년 2월 13일

배경 정보

폴 레이그 이사관은 제322기지 이사관으로서 그의 품행에 관해 윤리위원회 연락책 제레마이어 시메리안과의 면담을 지시받았다.

녹취록

«기록 시작»

시메리안

요즘 좀 어떤 거 같냐?

레이그

네가 온다고 내 자신감에 도움이 안 되는 건 확실히 알겠다.

시메리안

우리 서로 친구잖아, 안 그래?

(정적.)

레이그

알았어.

시메리안

요점만 말할게. 넌 지난 O4 회의 14건 중 12건에 결석했고, 너희 기지의 전반적인 생산성이, 그러니까 변칙성 격리, 연구 열의, 기타 많은 면에서 지난 석 달 동안 곤두박질쳤고, 네 사무실에서 "쓰레기와 수치심" 냄새가 난다고 항의한 게 열여섯 명이고, 네가 근무 시간 중에 잔다는 얘기가 자꾸 들려.

레이그

흠.

시메리안

반박할 거 있으면 해.

레이그

모르겠다. 난, 난 그냥… 아니다. 무시해.

시메리안

번아웃이야?

레이그

어쩌면? 그냥 좀 슬럼프가 찾아온 것 같은데.

(시메리안이 레이그를 조용히 바라본다.)

레이그

내가 우울한지 뭔지 도저히 모르겠어. 의자에 박혀서, 하루 치 개같은 서류 작업 나부랭이부터 해치우고, 남은 프로젝트 뭐시깽이도 싹 배정하고, 집에 갈 때까지 남은 시간은 내내 컴퓨터 화면만 줄창 쳐다보는데, 지겨워. 전부 다 지겹다고.

시메리안

더 큰 문제가 있어서 이러는 걸지도 모르겠다.

레이그

그야 해 뜨면 덥지.

시메리안

언제부터 이러기 시작했어?

레이그

변칙존재 하나 맡아서 연구하고 있었지. 뭐였는지는 기억하기 귀찮고. 근데, 막… 글쎄다. 이 망할 변칙의 망할 파일이나 보고 앉아있자니 모든 게 허망하게 느껴졌어. 그때 열정이 팍 죽어버린 거 같네.

시메리안

누구나 그럴 수 있지. 야, 폴. 내가 그런 사람들 많이 케어하잖냐. 너랑 똑같은 문제에 빠진 사람들 말이야. 네가 이사관 몇 년 차지?

레이그

8년 차.

시메리안

아. 음, 보통보다 좀 빠르긴 하네.

레이그

징징대봤자 뭐가 바뀌는데? 나 할 일은 알아서 다 하잖아. 다시 좋아지겠지.

시메리안

뭐가 문제인지 말을 해 주라. 왜 그런 기분이 드는데? 부탁이다, 너 돕자고 이러는 거잖아.

레이그

왜 그러는데? 의미가 없다고. 전혀! 지긋지긋해. 그냥… 마음 추스를 시간 조금만 주면 바로 복귀할게. 도와주려는 건 진짜 고마우니까, 제르.

시메리안

오늘 네 엉덩이라도 걷어차 주고 기적처럼 네 의욕을 되살리려고 보자고 한 건 아니었어. 네 원래 역량은 네가 잘 알잖아. 그게 돌아와야 해. 지금 네가 내놓는 정도보단 더 필요하다고.

레이그

믿어주라, 나도 진짜 그러고 싶으니까. 그런데 그놈의 역량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고. 말 그대로 불가능해. 이런 마당에 노력할 이유가 있어?

«기록 종료»

레이그 이사관과 SCP-8000이 차원문을 넘어가 커다란 도서관의 서재로 들어온다. 웅장한 문이 열려 책 수십만 권이 짙은 마호가니 책장에 꽂힌 모습이 보인다. 책장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이어지고 천장까지 뻗는다. 분위기는 잠잠하고, 재와 낡은 종이 냄새가 살짝 풍긴다. 자그마한 빛의 구가 책장 사이를 춤추며 돌아다녀 두꺼운 책과 복도를 밝힌다.

레이그

방랑자의 도서관은 이미 가봤어.

SCP-8000

여긴 나의 도서관이라네. 그 광대들이 내 무한한 도서관 아이디어를 베껴간 게야. 나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빌려 왔고 말일세.

둘은 서재 밖으로 걸어나온다. 담쟁이와 덩굴로 덮인 석재 아치 길이 제멋대로 뻗어 나가는 각 복도 앞을 지킨다.

레이그

이런 류의 무한한 도서관이 세 개째 있었으면 내가 들어봤을 법도 한데.

SCP-8000

주목받길 꺼려서 숨겨왔지. 뭐, 여기 _자체_는 도서관이 아니네만. 자네 도서관이지.

그들은 한 아치형 입구에 다가간다. 쐐기돌에는 "기억의 길"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상태다.

SCP-8000

산책이나 하지 않겠나?

레이그와 SCP-8000이 계속 나아간다. 그들은 복도 중 한 구역에 들어간다.

SCP-8000

이 장소에는 모든 경험, 모든 순간, 모든 지식, 모든 감정이 담겼다네. 그야말로 자네를 그려둔 지도라 할 수 있겠지, 폴 선생.

레이그

얼마나 자세한데?

SCP-8000

자네 몸에 새겨진 피아노 연주법이 저 위에 있군. 먼지가 잔뜩 쌓였어. 그 옆으론 어릴 적 상어라면 뭐든 섭렵했던 꼬마 전문가의 기억이 네 권 있네. 이쪽으로 더 가면 자네의 초등학교 수업이 한순간도 빠짐없이 소장되었고 말이야.

레이그

얼마나 자세하냐고.

SCP-8000

난 전부 읽어보았네. […] 뭐라 판단하진 않겠네.

레이그

그럼 그것도—

SCP-8000이 시야 밖으로 솟구쳤다가, 책장에서 먼지가 쌓인 책을 꺼내서 레이그에게 떨어트린다. 레이그는 책을 펼친다.

여덟 살 레이그가 공공 수영장에서 헤엄친다.

레이그는 수영장 가장 깊은 곳에서 사다리를 잡고는, 아래로 가라앉았다가 위로 올라갔다가 한다. 그는 이 일을 4번 반복한다.

갑자기 레이그가 수면으로 올라오려다 실패한다. 수영복 바지 안감이 사다리 아래의 부서진 마개에 걸렸다.

레이그는 패닉에 빠져 첨벙거리고 물 위로 나오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그는 바지끈을 풀고 벗으며 수영해 나온다. 그는 알몸이지만, 살았다.

레이그가 연심을 품었던 한 명을 포함해, 여자 두 명이 사건 전체를 목격하고는 그를 빤히 본다.

레이그가 헐떡이며 가슴과 팔을 부여잡는다.

SCP-8000

그래, 그것까지도.

레이그

맙소사! 진짜마냥 생생하잖아, 이거.

SCP-8000

진짜니까. 자네는 그걸 겪었고, 나는 자네가 그걸 다시 겪도록 돌려놓았을 뿐일세.

레이그

이게 네가 하는 일 전부야?

SCP-8000

자네의 부끄러운 순간을 다시 체험시키는 일? 아닐세. 그건 맛보기였지. 방금처럼 직접 다시 겪어볼 수도 있지만, 관객으로서 지켜볼 수도 있다네.

레이그

부탁이야, 이렇게 무릎 꿇고 빌 테니까, 우리가 여기서 대체 뭘 하는지 말해주면 안 돼?

SCP-8000

자네가 실패한 기억을 찾아온 게야. 꽤 많다네. 다른 사람들 대개보다 많다네, 왠지는 모르겠네만.

레이그

차라리 다시 물에 빠뜨려.

회수 문서 8000.2
2024년 2월 14일

배경 정보

제레마이어 시메리안 박사가 레이그 이사관의 여러 친한 동료를 불러 모아 그의 기분을 북돋아 줘 도움을 주려 했다.

녹취록

참석 인원
다니엘 애시워스 이사관
해럴드 블랭크 박사
제레마이어 시메리안 박사
앤서니 코익스 박사
랜달 하우스 이사관
콜 데레븐 박사
SCP-5595

«기록 시작»

(시메리안이 레이그를 이끌고 제322기지 회의실에 들어온다. 안에는 그의 동료가 빙 둘러서 책상에 앉았다. 레이그 앞에는 빈 의자가 있다.)

레이그

상담? 지금 나랑 장난하냐?

시메리안

상담 아니야.

SCP-5595

누가 봐도 상담이잖나. 그는 얼간이일 뿐이지, 바보는 아니다.

(레이그가 빈 의자에 털썩 앉아 조용히 투덜거린다.)

시메리안

우린 네 커리어와 감정 상태 얘기를 좀 하고 싶어. 몇 명은 미리 말할 거 준비해왔는데, 먼저 말할 사람?

(데레븐이 팔을 치켜 올린다.)

시메리안

콜?

(데레븐이 다리 밑에서 구겨진 종이를 꺼내 읽는다.)

데레븐

레이그 씨, 당신이 근 몇 달간에 겪은 상실에 크나큰 유감을 표합니다. 애완동물을 잃는 경험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제 애완 도마뱀붙이 클라이드가 레이그 씨의 개처럼 잔혹한 차 사고에서 죽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게 아픕니다. 레이그 씨 개와 저 밖의 모든 죽은 개와 애완동물에게 조의를 표합니다.

시메리안

콜, 그게 아니라—

(레이그가 손을 들어 시메리안을 막는다.)

레이그

그 마음 고맙게 받을게, 콜. 고마워.1

시메리안

다음, 앤서니?

코익스

지난주에 네 검토랑 서명이 필요한 문서가 몇 장 있었어. 부탁했더니 금방 본다 해놓고, 막상 몇 시간 지나서 가보니까 내 서류는 뭔 픽업 아티스트 책 밑에 깔렸더라. 그거 수습하느라 난 닷새나 잔업 해야 했다고. 그뿐인가? 네가 노쇼한 회의 대타 뛴 것도 다 해서 여섯 번이다. 야근 수당이라도 받았으면 몰라, 그것도 아니야.

레이그

뭐? 수당 못 받았어?

코익스

네가 삭감했잖아.

레이그

아니. 아니, 그런 적 없는데.

SCP-5595

아 맞다, 그건 내가 했다.

레이그

뭐 인마?

SCP-5595

테일러 스위프트 에라스 투어 티켓을 되팔이했다고 얘가 날 씹새라고 불렀다.

애시워스

이 풍선껌 뽑기 기계는 뭐 하는 애야?

코익스

통합 프로그램 제1호 변칙존재야. 레이그가 재정부에 갖다 놨지.

애시워스

썩 좋은 생각 같진 않은데.

레이그

고맙다, 떡대야. 내가 분명 네 의견도 물었지.

애시워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변칙존재가 재단 자원을 관리한다니, 그다지 좋은 생각은—

레이그

나랑 말싸움 시작하려 하지 마, 댄. 네가 요정Fae 여자친구를 사귀려다가 망한 거 모두가 기억하고 널 볼 때마다 그 생각만 하거든.

애시워스

시발놈아!

(애시워스가 방을 떠나려 움직인다.)

애시워스

남자라면 한 번쯤 해볼 만하잖아!

(애시워스가 밖으로 나가며 문을 쾅 닫는다.)

하우스

또 시작이다.

블랭크

다음은 내가 하지. 지난 8년 동안 넌 굉장히 자립심 강한 사람이었잖아. 웬만한 사람들보단 훨씬 더. 자기 보고서 좀 훑어봐 달라고 연락한 적도 거의 없었고. 그런데 요즘은 자신감 떨어진 게 보일 지경이야. 일을 그냥 바로 하면 될 시간에 일하는 방식이랑 인생철학이나 하나하나 따져보는 네 모습을 봐. 넌 똑똑한 애잖아. 걸맞게 좀 굴어.

레이그

이젠 조언마저 청하지 말라 이거야?

시메리안

그 말이 아니잖아.

레이그

그래서 뭐? 여기 가만히 앉아서 듣기나 해?

시메리안

아무도 너 공격하는 거 아니야.

블랭크

폴, 말 좀 들어. 살다 보면 오르막길도 만나고 내리막길도 만나는 법이야. 네가 생각하기에 네가 엄청, 엄청 높은 봉우리에 올랐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다시 전처럼 평범한 골짜기에 돌아오니까 눈높이가 맞지 않는 것뿐이야. 세상이 막 끝장나고 그런 거 아니야. 네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한.

시메리안

자, 랜달?

하우스

긴말 않으련다. 지금 넌 찡찡대는 개새끼야. 내가 매일같이 얼마나 많은 개짓거리를 상대하는지 알기나 해? 내 직장은 문자 그대로 지옥이라고. 가끔씩은 쉽고 가벼운 거나 조사하면서 한숨 좀 돌리면 여한이 없겠다.

SCP-5595

난 이 꼴통의 말에 동의한다.

하우스

짜증이 나지. 네가 짜증 나게 구니까. 이딴 악순환을 몇천 번이나 봤는지 몰라. 각자들 뭐 불안감이야 있겠지. 근데 난 전혀 신경 안 써. 99%는 그냥 지한테 만족 못해서 찡찡대는 거거든. 이딴 피해 의식은 이제 질렸다고. 자신감 도로 채워넣고 작작 찡찡대.

레이그

하! 똥 묻은 개가 나무라시네.

시메리안

얘들아, 누구 비판하자고 모인 거 아니라고 서른 번은 얘기했잖아!

SCP-5595

650번은 말해야 하지 않았을까.

하우스

얜 비판 좀 들을 필요가 있어.

레이그

지금 누가 찡찡대는 개새낀지 따지고 싶다 이거지?

하우스

적당히 하시지.

레이그

고결하신 기지 이사관 씨 납셨네. 그 대마초 반대하는 게이머 누구, 맨날 지 흰둥이로 그리는 그놈 하나 잡자고 악마 징집해다 쓰셨더라지? 그랬지? 자신감 만땅이긴 하신가 봅디다, 랜디.

하우스

그래, 그래, 그러든가. 아니면 이건 어때. 여기서 나가면 그냥 좆잡고 네 인생이나 제대로 쳐 살라고.

레이그

있잖아?

(레이그가 일어선다.)

레이그

좆잡고 인생이나 제대로 살라고? 얼마든지 해 주지, 나 혼자서.

하우스

어디 얼마나 잘하나 보자.

레이그

똑똑히 보라고.

(레이그가 나간다.)

시메리안

참 잘했다 얘들아. 굉장한 성과야. 아주 효과적이겠네.

SCP-5595

고맙다.

«기록 종료»

레이그

맞다, 나 네 꼬리 봤다.

SCP-8000

오, 그럴 리가.

레이그

너 포탈 들어설 때 한순간 보였어.

SCP-8000

불가능한 일일세.

레이그

어쨌든 전신이 도서관에 들어왔잖아.

SCP-8000

그렇지. 흠. 무슨 말인지 알겠네. 어떻게 생겼었나?

레이그

평범한 물범 꼬리던데.

SCP-8000

경천동지할 사실이군. 문서에 갱신해두도록 하겠네.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이네만.

SCP-8000이 책장 사이사이를 빠르게 날아다니며 책 한 무더기를 가져온다.

SCP-8000

자네 문서라네. 이 두꺼운 책들에는 자네 유년기가 담겼지.

레이그 이사관과 SCP-8000이 어느 아이의 침실에 나타난다. 벽면은 남색이다. 침대 반대편에는 어린이 스포츠 리그 우승 트로피 여러 개가 책꽂이에 쭈르륵 나열되어 있다.

레이그

아니, 말도 안 돼.

레이그가 방 안을 거닐며 지나가 협탁에서 배트맨 만화책을 집어서 넘겨 읽는다. 그는 뒤표지 바로 안쪽에 도달하고 멈춘다.

SCP-8000

그건 무엇인고?

레이그

어릴 적엔 만화책 뒷장에 나만의 배트맨 만화를 그리곤 했어. 여기 몇 개 더 있을 텐데.

레이그가 침대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SCP-8000

얼마나 그렸나?

레이그

수십, 아니 수백 개는 되나. 기억이 안 나네. 근데 엄청 좋아했던 건 확실해. 해양생물학자나 대통령 전에는 선화 작가가 장래희망이었거든. "만화 그리기 강좌" 같은 책도 잔뜩 모았고. 대고 베끼는 거 말고는 제대로 못 써먹었지만, 그래도 멋졌지. 근데 언제부턴가 그냥 관뒀어. 왜 그랬더라? 학교 가느라 그랬나. 아니면… 아 썅!

예닐곱살로 보이는 한 아이가 침대 옆에 고꾸라져 조용히 울먹인다. 주변에 구겨진 그림이 여러 장 흩어져 있다.

SCP-8000

염려 말게. 저 아이에겐 우리가 안 보이니까. 보였다간 역설을 초래하겠지.

레이그

이거 너무 이상해.

SCP-8000

아까 그만뒀다고 말했던데.

레이그

안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몽상에 불과하지만, 뭐, 만약이란 게 있잖아?

한 여성이 문을 밀치고 방에 들어온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여성

괜찮니?

여성이 아이를 찾아가더니, 자리에 앉아 눈을 마주친다.

여성

뭐가 잘 안 돼?

아이

못 그렸어요.

여성

음, 엄마 생각엔 아닌 거 같은데.

아이

못 그렸다니까요!

여성은 소매로 아이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는다.

여성

아가, 계속 그렇게 생각하면 앞으로 뭘 해도 행복할 수 없을 거야.

아이

그만둘래요! 물고기 의사나 하고 그림 따윈 다시는 안 그릴 거에요.

여성

뭘 하든 엄마는 널 응원한단다. 치킨가스 빵가루 입히는 거라도 도와주련?

아이

[…] 알았어요.

두 사람은 일어서서 방 밖으로 나간다. 여성은 아이의 손을 움켜잡는다.

여성

대학에서 해양생물학을 전공할 돈을 어디서 구할진 모르겠지만, 너 하고 싶은 거라면 엄마는 얼마든지 도와줄 거란다.

레이그

딱 그날 그만두었어. 아마. 있잖아, 이제 와서 보니 여섯 살이 그린 것치곤 그리 나쁘진 않네. 그냥 내가 버릇없는 꼬맹이였나 봐.

SCP-8000

과거형인가?

레이그

거 곱게도 말씀하시네.

SCP-8000

왜 계속 그림을 그리지 않았지?

레이그

내가 그 분야에서 중요한 일을 뭐라도 할 확률은 사실상 0에 가까웠어. 나는 제2의 잭 커비나 스탠 리가 되고 싶었지만, 가능할 리가 없었지. 우리 아빠는 대학 미식축구 팀에서 스카우터로 일했어. 담당한 선수들 얘기를 늘상 하곤 했지. 그 사람들은 자기네 고등학교에선 300명 중 1등을 놓친 적 없는 최고들이었지만, 아빠는 알았지. 대학 경기장에 들어선 순간 진짜 실력은 백분위 최하위가 되리란 걸. 아빠는 절대로,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어.

SCP-8000

그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나? 자신과 남들의 실력을 끝없이 깎아내리기만 하는 인생이라니 어찌나 암울한가.

레이그

내가 뭐 새로운 관심사에 끌린다 싶으면 아빠는 언제나 그런 혹평을 던지셨어. 항상, 항상 항상, 바로 다음날이면 대화에 이런 주제를 꺼내고야 말았지.

SCP-8000

선수들이 아니라 자네를 두고 하는 말이었으렷다.

레이그

눈치 한번 빠르시네.

SCP-8000

폴 선생, 자신의 기준은 자기 스스로 세워가야 하는 법일세. 잘 알지 않는가?

레이그

틀렸어.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댁 말대로 됐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레이그가 조용하고 차가운 방 안의 책상에 앉는다. 그는 열여섯 살이며, 책상에 앉은 다른 청소년에게 둘러싸여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치는 SAT 시험지를 바라본다.

레이그가 어머니 반대쪽에 앉았다. 그는 마닐라지 봉투를 연다.

레이그

1520점.

여성

어머, 어쩜 좋아! 축하해!

레이그

전 좋은 대학에 가고 싶다고요, 엄마. 1520점으론 부족해요.

여성

그게 무슨 얘기니? 상위 1%잖니.

레이그

헨리, 네이트, 심지어 이사벨라까지 1540점대 이상이라고요.

여성

네이트가? 커닝이라도 했대니?

레이그

지금 그 얘기가 아니라, 1520점으로는 존ㄴ… 몹시 빠듯하다고요.

여성

1520점이든 1540점이든 상위 1%인 건 똑같잖니. 터무니없는 소리는 그만 하렴.

레이그

충분히 좋지 않—

여성

얘. 네가 평생 이렇게 구는 거 엄마가 여지껏 받아준 거 알잖아. 한 번만이라도 네가 해낸 거에 기뻐하면 안 되겠니? 네가 자랑스러워, 폴. 그것도 중요하지 않니?

레이그

결국엔 내가 맞았어. 난 아이비리그에 붙지 못했지.

SCP-8000

학부 생활을 통틀어 자네는 전과를 다섯 차례나 했더군. 컴퓨터공학, 그래픽 디자인, 조리학, 또 기계공학까지 갈아치우는 데에 1년 반도 채 걸리지 않았다네.

레이그가 기숙사 방바닥에 앉아 있다. 물리학 서적 중 탄성 부분이 펼쳐져 있다. 레이그는 운다.

레이그

아 저건 좀 치워주라! 결국 생물학에서 길 찾았고 제때 졸업도 했잖아.

SCP-8000

왜 다른 선택지는 포기했지?

레이그

왜기는. 개념부터 이해가 안 됐으니까―

SCP-8000

그건 사실이 아니잖나. 자네는 재단 직원이 아닌가. 똑똑한 사람인 걸 누가 모르나.

레이그

진심이야?

[…]

레이그

회, 획기적이지가 않았어. 나보다 훨씬 잘난 사람들이 이뤄둔 거나 공부해서 그 잘난 사람들이 다 만들어둔 기계의 톱니바퀴가 되는 꼴이었다고. 위로도 아래로도 움직일 일 없이, 아무 회사에나 처박힌 채로. 도저히 못 하겠더라. 어쩌면 일부러 태업한 걸지도 몰라. 세 번째쯤에는 지도교수님도 나한테 완전히 질려버린 거, 다 알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삶에 억지로 맞춰 들어갈 순 없었어.

SCP-8000

뭐라도 업적을 남기고 싶었나?

레이그

그래, 그게 뭐 죄라도 돼?

회수 문서 8000.3~4
2024년 2월 18일 ~ 2024년 2월 19일

배경 정보

레이그 이사관이 다음 프로젝트 제안을 감독관 평의회에게 발표할 권한을 받았다.

프로젝트 시커
찾은 사람이 임자.

프로젝트 설명

시커 머신Seeker machine은 초상기술 장치이다. 시커는 국소 웜홀과 양자 컴퓨팅으로 사용자가 입력한 자세한 매개변수를 토대로 미발견 변칙존재를 찾아낼 수 있다. 시커의 인공지능 시스템과 웜홀은 평행세계의 지구 35,000,000개의 역사와 경험을 바탕으로 미발견 변칙존재의 위치, 분류, 능력을 예측할 수 있다.

사용자는 GUI 인터페이스로 여러 매개변수를 입력해 시커가 정확히 어떤 변칙존재를 평행현실 몇 개에서 찾아야 할지 지시할 수 있다. 시커는 평행우주에서 변칙존재가 나타나는 요인과, 변칙존재의 지구 상 위치를 제공하며 최상의 결과를 출력할 것이다.

배경 정보

레이그 이사관이 감독관 평의회 앞에서 발표한 기록의 일부.

녹취록

<기록 시작>

O5-2

이사관님, 당신 일이 누구 똥이 굵은지 내기하는 건 줄 압니까?

레이그

아닙니다.

O5-2

수백만 달러를 여기 소모해야 할 이유라곤 하나도—

레이그

제가 도출한 추정치로는—

O5-2

아니, 수백만도 아니죠. 재단 자산 수십억 달러를 들여서 만든다는 게 우리가 이미 해내고 있는 걸 또 하는 이론상의 도구라뇨. 당신 자존심 살리는 것 외에 어떤 효용이 있는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복사기가 O5-13의 자리에 앉아 말한다.)

O5-13

커다란 기계가 요즘 대유행이라지.

O5-1

네가 여기 관심을 가지다니, 참 충격이네, 삼삼.

O5-13

그렇게 부르지 마라.

O5-2

커다란 기계가 유행이라느니 하는 그 메모는 어디서 주워들은 겁니까?

O5-13

제17기지 깊은우물.

O5-1

거기서 좋은 게 하나라도 나온 적이 있나? 툭하면 현실이나 망가트리고, 신들이나 죽이고,

O5-2

어떤 분께서 거기다 돈을 계속 쾌척하셔서 그만.

O5-13

어쩌면 내가 복사기에 갇힌 채로 지내기 싫을지도 모르지. 자네들 그런 생각은 안 해봤나?

레이그

17기지 깊은우물과 이 건을 상의하긴 했습니다.

(O5-7은 자신의 키보드를 두드린다.)

O5-7

제 무덤 파는 짓은 그만하지 그래.

O5-5

레이그 씨, 먼저 다시 뵙게 돼서 몹시 기쁘다고 말하고 싶네요! 우선, 이거 아주 굉장한 아이디어군요! 어떻게 이걸 떠올리셨죠? 멋지네요! 자, 저는 이게 재단에 큰 이득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고 확신합니다만, 여기 담긴 의도가 뭔지 궁금하군요. 윤리위원회에서 시메리안 씨가 보고한 바를 읽었는데, 레이그 씨가 우울증을 약간 겪고 있다 하던데요.

레이그

이런 사생활 얘기는 비밀로 보장되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O5-7은 자신의 키보드를 두드린다.)

O5-7

우리는 보복부의 빡빡한 규칙 따위에 지배받지 않는다네.

O5-13

보복이라니, 그치들이 우리한테 손이나 댈 수 있겠나? 문제가 될 일은 없네, 칠. 뚱딴지같은 소리 하지 말고 본론에나 집중하지.

O5-1

폴, 오의 질문에 먼저 답해 주게.

레이그

예, 분명 정신 상태가 그리 좋진 않았지만, 그건 단순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자기성찰도 해보고 그랬던 걸까 고민해본 결과 프로젝트를 이끄는 데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저 자신과 제 직원들이 흥미롭고 새로운 연구 활동의 최전선을 누비게 해줄 것입니다.

O5-2

우리는 이미 지구 곳곳에 변칙존재 탐지 자산을 뿌려놨죠. 그걸 전부 뜯어내고 다시 하자는 얘긴가요?

레이그

아뇨, 이건 전혀 다른 계획입니다. 바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죠. 물론, 저희가 가진 변칙존재 탐지 체계는 단연코 최상입니다. 반박의 여지도 없고, 이 프로젝트가 그보다 좋다고 우겨볼 구석도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체계는 실시간 탐지용이죠. 한편 제가 제안하는 것은 변칙존재가 나타나기도 전에 언제, 어디서, 왜 그것들이 나타날지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장치 말입니다.

<기록 종료>

배경 정보

레이그 이사관이 감독관 평의회 앞에서 발표한 기록.

녹취록

<기록 시작>

코익스

잘 됐어?

레이그

믿어주던데.

코익스

네 불안감 해소용 장치에 감독관들이 잔뜩 투자해줬다고?

레이그

부를 거면 좆잡고-인생-제대로-살기 기계라고 하지 그래. 그리고 어, 승인 났어.

코익스

내가 널 지나치게 잘 아는 걸 수도 있겠다마는, 그래도 내가 꿰뚫어 볼 만큼 얄팍한 거짓말을 감독관들이 놓쳤을 것 같지는 않은데.

레이그

어 그래. 그 사람들도 꿰뚫어보더라고.

코익스

[…] 뭔 짓 했냐, 너?

레이그

깊은우물에 연락한 적 없어. 변칙성 탐지 체계로 만든 것도 당근 아니고.

[…]

레이그

거짓말 한 거야.

<기록 종료>

레이그

반대로 내가 널 멋대로 분석하면 넌 기분 좋겠어? 난 연구 대상이 아니란 말이야.

SCP-8000

자네가 질문해선 안 된다는 법은 전혀 없다만.

레이그

너 이름은 뭔데?

SCP-8000

흠. 난 이름이 없네. 이유는 모르겠군. 누구랑 이 화제로 이야기해본 것도 한세월인지라

레이그

좋아. 내가 보기엔 넌 윌리엄이 어울려. "윌"로 줄여부르는 윌리엄은 말고. 빌로 부르는 쪽에 가까워.

SCP-8000

서로 무엇이 다르지?

레이그

대머리만 보면 빌이란 이름이 떠오르더라. 왠지는 모르겠어.

SCP-8000

나에겐 머리털이 있네. 전신이 털로 덮였단 말일세. 자네 눈은 멀쩡하잖나. 그건 확실히 안다네.

레이그

그치 근데 대머리처럼 보이는 걸 어떡하라고. 그레그는 어때?

SCP-8000

이름 후보에 그럴 듯한 까닭이 없으니 덜 특별하게 느껴지는군.

레이그

그럼 프랜시스는? 줄여서 프랭키.

SCP-8000

여태 이름을 자칭하지 않아온 이유가 기억이 나는 듯하이. 내가 처음 나타나서는 "안녕하신가, 폴 선생. 나는 프랭키라네." 따위의 말을 했다면, 자네가 절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걸세.

레이그

무지막지하게 긴 물범이 나타난 것 자체가 황당한데 이제 와서 뭘.

SCP-8000

나와 우연히도 닮은 그 바보 같은 포유류가 내 일과 얼마나 안 어울리는지만 해도 이미 충분히 성가신 일일세. 우주구급 악질 유머는 그걸로 족함세.

레이그

내가 또 이런 거 전문가거든. 너 뭔가 하나 고르긴 해야 돼. 몇 년 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SCP-8000

그래, 상아와 고래뼈 세공품의 신 말이로군. 스코도는 자기 직책에 아주 충실하지. 허나 내 접근법은 조금 다르다네.

레이그

제발 이름 좀 골라.

SCP-8000

흥미롭구먼.

레이그

또 시작이야.

SCP-8000

자네 내면을 들여다보니,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는 강박적인 인격만이 보이는군 그래. 청소년 시절 자네 그림 실력은 그 또래 치고는 나쁘지 않았고, 외려 누군가는 꽤 괜찮다 할 정도였네. 그럼에도 자네에겐 충분치가 않았지. 자네가 관둔 건 완벽하려는 집착 때문이었네.

레이그

미래가 안 보이는 길에서 더 나아가지 않은 게 나쁜 결정은 아니었다 보는데.

SCP-8000

자네는 뭘 하든 대부분 그러잖나. 학업이든, 오락이든, 그 외 뭐든지. 상승세를 잘 타다가도 역경의 전조의 꽁지만 보여도 지레 포기해버리지.

SCP-8000이 근처의 검은색 문고본 책을 집어 든다.

레이그가 자신이 다니는 대학교의 교내 농구 리그에서 경기를 뛴다.

경기는 4쿼터이며 동점이다. 15초가 남은 시점에서 레이그의 팀이 공을 가진 상태이다. 두 팀 모두 남은 타임아웃은 없다.

팀원이 패스를 받았으나, 수비수 두 명이 빠르게 압박해 온다. 그는 반대편 코너의 다른 팀원에게 신속히 패스한다. 7초가 남았다.

팀원은 슛을 던지는 척했다가 페인트 존까지 드리블하고서, 레이업을 넣으려는 척 속이고는 레이그에게 공을 던진다. 3초가 남았다.

레이그는 패스를 놓친다. 공이 튕겨 수비수의 손으로 들어간다. 공을 잡은 수비수는 반대편 골대로 빠르게 달려간다. 1초가 남았다.

선수가 3점 슛 라인 밖에서 슛을 쏴 골대에 넣고, 경기를 승리로 이끈다.

레이그는 경기 뒤풀이에 참석하지 않고 떠난다. 다음 연습에도 레이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레이그

아오, 진짜! 저건 그럴 만 했잖아. 그래, 난 그림 때문에 유치하게 굴었고, 희망 대학에 못 붙어서 열불이 났어. 근데 이건 그냥 쪽팔릴 뿐이잖아.

SCP-8000

그 사건들을 깎아내리는 건 자네 맘이지만, 결국 그것들이 모여서 지금의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를 만들어왔지 않은가.

레이그

그렇게 갖다 붙이는 건 뭐든 할 수 있지. 사회화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

SCP-8000

자네는 한 게임을 지자마자 농구를 그만뒀지. 부끄러움이 그렇게 심했나?

레이그

쉽게 이길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손에 참기름 바른 거마냥 공을 놓치는 꼴을 본 팀원들 얼굴을 보는 게 부끄러웠냐고? 어. 부끄러웠지.

SCP-8000

무얼 그리 꺼리는가? 부끄러움은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라네.

레이그

그거 알아? 넌 위선자야. 다른 사람이 이름을 들으면 너에 대해 뭐라고 생각할지 두려워서 이름을 가져볼 생각조차 안 해. 그날 패배한 건 나 때문이었어. 나 혼자 때문에. 다른 사람한테 보여줄 만큼 좋지 않아서 그 그림을 세상에 당당하게 내놓지 못했어. 아이비리그에 못 붙어서 잔뜩 짜증이 났어. 내가 거기 갈 정도로 똑똑하단 걸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알란 말이야. 너도 나와 똑같아. 그리고 내가 뭐라도 할 수 있는 한, 그 바보들이 나보단 자기가 낫다고 생각하게 두지는 않을 거야.

SCP-8000

본심 나왔구먼.

레이그

우와아. 우와아. 딱 들켰네. 참 잘하셨어요. 그래도 넌 위선자야.

SCP-8000

내 이름은 월리스일세, 폴 선생. 월리라고 불러도 좋네. 나는 월리스고, 언제나 월리스였네. 하지만 자네는 여전히 자기 자신이 파고 들어가 갇힌 곳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는군. 이것만은 알아주게. 난 자네를 도우려 한다네.

회수 문서 8000.5~8
2024년 3월 13일 ~ 2024년 3월 20일

배경 정보

시커가 발견한 변칙존재 목록 요약본.

시커.01

입력 우주: 104,257개
매개변수: '가까운' '생물' '큰' '위험한' '필라델피아에-있는'

시커 발견

삼각 측량 결과 변칙존재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홈 구장인 시티즌스 뱅크 파크에 있다.

설명 요약

SCP-01-SEEK.

SCP-01-SEEK는 인간형 키메라 변칙존재로 뚱뚱한 녹색 새를 닮았으며 필라델피아 필리스 유니폼을 입었다. SCP-01-SEEK는 지각력과 지성이 있고, 말을 할 수 있다.

녹취록

레이그

그게 인형탈이 아니라고?

SCP-01-SEEK

응.

레이그

지금껏 보아온 마스코트의 정체가 살아있는 생물이었다니.

SCP-01-SEEK

맞아. 내 책 읽어봤어? 거기 다 나왔어.

레이그

그래, 거기서 네가 갈라파고스에서 왔다고 한 건 아는데 말야. 헨슨 몬스터 샵에서 패너틱 인형탈을 만들었다는 사료가 엄연히 있다고.

SCP-01-SEEK

찰스 다윈 만나본 적 있어.

레이그

아 그래, 그러셔?

SCP-01-SEEK

난 지난 70년 동안 진화론이 틀렸다는 주장을 퍼트려왔지. 학교선택제를 만든 놈이 바로 나야.

레이그

왜 다윈이 네 이야기는 쓰지 않았지?

SCP-01-SEEK

못 쓰게 막았지.

레이그

어떻게?

SCP-01-SEEK

먹어버리겠다고 했거든.

레이그

그랬더니 믿어주던가?

SCP-01-SEEK

녀석의 조수를 먹었지.

레이그

진짜?

SCP-01-SEEK

통째로 삼켰어.

레이그

굉장하네.

SCP-01-SEEK

콧구멍을 뱀처럼 크게 벌려서 말야.

레이그

사람 먹기를 좋아하나?

SCP-01-SEEK

그것만큼 좋은 게 없지.

레이그

그래도 괜찮은 건가?

SCP-01-SEEK

상어도 그러잖아. 상어한테도 화 낼 셈이야?

레이그

상어는 사람을 노려서 사냥하지는 않잖아.

SCP-01-SEEK

사람을 사냥한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레이그

사람을 사냥해?

SCP-01-SEEK

응, 주로 어린이로. 문 옆에 서서 날 발견할 때까지 기다리는 걸 좋아해.

레이그

혹시 내가 뭐라 반응이라도 해 주길 바라는 건가?

SCP-01-SEEK

내 핫도그 총 봤어? 거기 넣은 핫도그가 사람고기로 만든 거야. 내가 사냥한 사람으로.

레이그

환상적이구만.

SCP-01-SEEK

내가 던진 핫도그 먹어본 적 있어?

레이그

아니.

SCP-01-SEEK

사람고기로 만든 거야.

레이그

네가 그렇게 생겨먹은 주제에 생명체고, 거의 200살인 데다가 사람까지 잡아먹는다니 믿을 수가 없네.

SCP-01-SEEK

내가 널 먹지 않을 거라 생각하다니 믿을 수가 없네.

시커.04

입력 우주: 30,124,610개
매개변수: '큰' '무서운' '위험한' '괴물'

시커 발견

삼각 측량 결과 변칙존재는 미국 플로리다주 에버글레이즈 국립공원에 있다.

설명 요약

발견 당시의 SCP-04-SEEK

SCP-04-SEEK는 인간형 변칙존재로 시공간 연속체 속에서 이동할 수 있다.

녹취록

레이그

여보쇼?

SCP-04-SEEK

여어, 별 일 없지?

레이그

여기서 사나?

SCP-04-SEEK

아니. 그냥 쉬러 나왔지.

레이그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SCP-04-SEEK

난 순간이동하는 걸 좋아해.

레이그

그게 다인가?

SCP-04-SEEK

시간여행도 할 줄 알지.

레이그

그 능력으로 뭐 중요한 일이라도 한 적 있고?

SCP-04-SEEK

기사랑 왕이랑 그런 놈들 있던 시절에, 영아 사망률이 왜 그리 높았는지 궁금해한 적 없나?

레이그

딱히 없군.

SCP-04-SEEK

난 과거로 돌아가서 꼬마들을 잡아먹거든.

배경 정보

레이그 이사관은 시커의 첫 시연에 참가했던 이들과 회의를 하였다.

녹취록

«기록 시작»

레이그

당신들 지금까지 대체 뭘 한 거야?

수석 엔지니어 하트웰

[…] 이사관님이 주문한 기계 만들기요?

레이그

왜 그 기계가 식인종들을 쏟아내고 있지?

엔지니어 와커먼

AI가 '위험한' 쪽 매개변수를 식인과 연관 짓는 경향이 강해서 그럴 수도요.

수석 엔지니어 하트웰

입력을 좀 더 구체화해야 할지도 모르죠.

레이그

어쩌면 당신네한테 더 구체적으로 말해야 했을지도 모르겠네. 이 기계는 그냥 격리고 나부랭이에 밀어 넣으면 끝나는 것들 따위나 찾아내자고 만든 게 아니란 말이야.

수석 엔지니어 하트웰

그런 요구는 사항서에 없었잖아요.

레이그

알아서 찰떡같이 좀 알아들으라고!

코익스

폴, 너 지금 정상 아니야.

레이그

아니, 전혀, 완전 정상이야. 이 프로젝트에 쏟아부은 돈만 수십억 달러야. 이 프로젝트에 쏟아부은 건 다름 아닌 그 자체라고. 세계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대위협을, 어떤 피해도 일으키기 전에 이 기계가 찾아낼 수 있단 걸 보여줘야 한단 말이야.

코익스

그러라고 누가 시켰는데?

레이그

누가 뭘?

코익스

네가 세계를 멸망시킬 위협을 찾아내야 한다매. 감독관들이 그러든?

레이그

내가 찾아내야 한다고. 내가! 수십억 달러를 들였더니, 아기 잡아먹는 엘모 간지럼인형 따위나 토해내는 초상과학 나부랭이에 내가 만족할 것 같아? 내가 얼마나 우스워 보일지 상상이나 돼?

코익스

우선 진정부터 해.

레이그

앤트, 한 번만 더 그러면 폴란드 120기지로 보내버린다. 짐, 이거 갖고 스캔 가능한 우주 개수가 최대 얼마지?

수석 엔지니어 하트웰

3,500만. 이미 거의 그만큼 돌리고 있어요.

레이그

그 수치를 확 끌어올려야겠어.

수석 엔지니어 하트웰

미쳤어요? 하란다고 그냥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싹 다 재조립해야 한다고요.

레이그

어째서?

수석 엔지니어 하트웰

이론상으로는, 잘만 하면 4,000만까지는 가능할지도 모르죠. 그런데 그랬다간…

레이그

그래서 수치, 바꿀 수 있어, 없어?

수석 엔지니어 하트웰

있죠.

레이그

최대 얼마까지 가능한데?

수석 엔지니어 하트웰

한계치랄 건 없긴 하죠. 근데 들으세요, 장치를 안정화하는 데…

레이그

당신이 만들었잖아, 짐. 고장 나면 직접 고치면 되지. 이걸 몰라서 물어?

수석 엔지니어 하트웰

우주 한계 바꿀 생각 따윈 없습니다.

레이그

맘대로 해. 난 아무 문제 없어.

코익스

또 바보짓 하기 전에 거기 서. 너 공학 낙제하지 않았어?

레이그

너 오늘부터 폴란드어 배워라.

«기록 종료»

SCP-8000이 솟구쳐 오르더니 가죽 장정본 18권을 가지고 돌아온다. 모두 SCP 재단의 로고가 새겨져 있다.

SCP-8000

자네가 기지 이사관으로 재직한 지 벌써 8년 차를 넘겼군. 더군다나 이사관치고는 상당히 젊은 편 아닌가? 생긴 모양새는 논외로 하고 말일세.

레이그

거 고맙수다.

SCP-8000이 책 한 권을 골라 페이지를 넘긴다.

SCP-8000

자네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급했지. 대체로 요인들과 맺은 인연 덕에 말이야.

레이그

자존감 한번 팍팍 올려주시네.

SCP-8000

비판하려는 게 아니라네, 폴 선생. 그저 사실일 뿐이지. 자네를 무자격자라 매도할 수는 없겠지. 허나 무스 양이나 맥기니스 씨가 제공한 기회가 아니었다면 얻을 수 없었을 자격이었다네.

레이그

누구라도 나 대신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겠지. 근데 내가 해온 일은 내가 해야만 했기에 한 거지 시키는 놈 하나 없었어. 내가 이사관으로 뽑혔을 때 달리 이사관직 맡을 놈도 하나 없었고.

SCP-8000

자네가 왜 지금 기지 이사관이라 생각하나?

레이그

내가 뭐라 답하면 좋겠는데? 자랑질이라도 해? 내가 가장 적격이었나 보지. 나도 몰라. 제때 제자리에 마침 내가 있던 걸 어쩌라고.

SCP-8000

서로 정직하게 대하자고 약속했잖나, 폴 선생. 여기 자네와 앤서니 씨가 1993년에 나눈 대화를 좀 보게.

레이그

그 가증스런 얍삽이가 이제 지 기지까지 생겼다고.

코익스

카지노는 40년대부터 타르타로스 독립체들이랑 지지고 볶은 곳이잖아. 결국 일어날 일이었다고.

레이그

아냐, 앤트. 이게 진짜 공평하다고?

코익스

공평하다고 한 적 없어.

레이그

걔는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리다고! 망할! 뭐 이런 법이 다 있어!

코익스

왜 이리 속상해하는지 모르겠네. 넌 25살에 선임 연구원이잖아. 나는 선임 직함은 고사하고 34살 먹고서야 내 거라고 할 만한 프로젝트를 처음 맡아봤는데.

레이그

난 여기 들어오고 내내 랜달한테 일방적으로 경쟁심을 불태워왔다고. 근데 이제 걔가 나보다 완벽히 위에 있단 말이야.

코익스

맙소사. 넌 가끔씩 정말 고집불통이라니까. 마음 좀 가라앉히고 네 사무실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 작업이나 해치우셔. 여기 앉아서 나한테 넋두리 늘어놓는다고 네가 감독관으로 승진이라도 할까 봐 그래?

레이그

철없던 때잖아. 질투했다고.

SCP-8000

질투한 까닭은 무엇이었나? 랜달 씨는 자네의 친구가 아니던가?

레이그

그치.

SCP-8000

랜달 씨를 미워하나?

레이그

미워하지 않아. 미워한 적 없어. 신입 시절부터 늘 좋은 멘토였는걸.

SCP-8000

하지만 자네는 그 당시 그렇게나 미움에 차지 않았나.

레이그

하 제기랄, 내가 대체 왜 이러는 거지?

(SCP-8000이 레이그를 골똘히 쳐다본다.)

레이그

내가 먼저 이사관이 돼야 했다고 생각했어.

SCP-8000

왜지?

레이그

그랬다면 내 모든 불안감이 해소됐을 테니까. 내가 녀석한테 한 방 먹여주면, 아무도 날 두고 여기 있을 자격이 없다는 투로 바라보지 않을 테니까.

SCP-8000

남이야 어찌 되었든 결국 자네도 자네 기지의 이사관이 되었잖나.

레이그

그치, 하지만 그때 가선 아차상을 받는 느낌이었다고. 하, 젠장. 내가 왜 이따구로 구는 거지?

SCP-8000

만족스럽지 않았던 겐가?

레이그

아냐, 만족스러웠어. 만족스러워야 했어. 난… 난 뭔가 중요한 걸 하고 싶었어. 내 이름을 위에 새겨넣을 만한 뭔가를 이루고 싶었다고. 내 한평생 동안, 항상 거기서 딱 한 걸음씩 뒤처졌단 말이야. 내가 바란 것은 그저, 그저 아주 조금이라도 인정받는 게 다였는데. 너도 봤잖아!

SCP-8000

이 우주의 보안과 안전을 총책임지는 단체가 누굴 기지 책임자로 앉히는 게 "아차상"이라니, 자네 생각에도 어처구니없지 않나?

SCP-8000이 다른 페이지로 책을 넘긴다.

레이그

네 의견이 필요해. 변칙개체 생각을 좀 듣고 싶어서. 격리 관련 일이야.

SCP-5595

네가 그렇게 말하니 욕 같이 들린다.

레이그

나 지금 뚜껑 열리기 직전이거든. 어떻게 한번을 그냥 안 넘어가냐. 들어봐, 우리 하급 연구원 하나가 오늘 독감에 걸려 결근했는데, 이 지루해 빠진 프로젝트에는 아무도 충원하러 안 온다고.

SCP-5595

무슨 프로젝트냐?

레이그

넣은 빵을 다른 종류의 빵으로 바꾸는 토스터. 변칙 물체 기록 항목이야.

SCP-5595

부디 네가 그 토스터를 내 밑으로 봐주길 바란다.

레이그

언제부터 그렇게 자존감이 낮으셨대?

SCP-5595

네 흉내 좀 내봤다.

레이그

내가 여기 퍼질러져서 이런 거나 두들겨야 한다니. 난 이사관이야. 내 일과가 이딴 거라니 뭔가 잘못됐다고.

SCP-5595

살면서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 본 적 있긴 하냐? 네가 할 일은 나머지 쥐새끼들이 미처 다 먹지 못하고 흘려둔 조각을 주워 모으는 거다. 너보고 앉아서 빈둥대다가 세상이 폭발하기 직전에 어슬렁어슬렁 일하러 나오라고 그 양반들이, 아니지. _내_가 너한테 월급 주는 것 같나. 하루 만에 쫓겨난 나조차도 너보단 이 일을 더 잘했다.

SCP-8000

자네가 좇아온 것을 얻었지만, 여전히 충분하지 못했군.

레이그

이거 더 이상 못 하겠어. 제발 그만 하면 안 될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가 하고 싶은 말 다 알아듣겠다고. 진짜로.

SCP-8000

확실한가? 자네는 인정을 원한다고 했지만, 인정은 진작에 받고 있다네. 기지 이사관에 오르기 전에도 이미 출세가도였지 않나. 앤서니 씨도 말했듯이 자네는 아주 젊은 나이에 아주 높은 자리까지 올랐지만, 전혀 만족치 못하고 더더욱 밀고 나갔지. 마침내 기지 이사관에 올랐지만, 그에 딸려오는 책임이 자네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던 게야. 한동안은 괜찮았겠지, 승진해서 부푼 마음이 버텨 줬을 테니 말이야.

레이그

인정 좋지, 근데 그거 잡겠다고 발버둥치다가 내가 세계 최악의 개자식이 되면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난 지금 천장 꼭대기에 있어. 돈, 힘, 인정, 날 챙겨주는 친구들까지, 어릴 적 꿈꿨던 모든 걸 얻고도 여전히 충분하지가 않아. 그런데 여기서 뭘 더 이룰 수 있을까? 이 위엔 아무것도 없다고.

SCP-8000

자네 말대로일세. 이 위에는 그리 도달할 만한 게 없지. 그런데도 자네는 계속 애쓸 테고.

회수 문서 8000.9~10
2024년 3월 22일

배경 정보

시커가 발견한 변칙존재 목록 요약본. 이전 요약본에서 이어짐.

시커.13

입력 우주: 629,814,230개
매개 변수: '생물' '지성' '무기' '오래된'

시커 발견

삼각 측량 결과 개체는 네바다주의 사막에 있다.

설명 요약

SCP-13-SEEK.

SCP-13-SEEK는 흔히 매체에서 묘사되는 카우보이의 모습을 닮은 지성이 있는 인간형 개체이다. SCP-13-SEEK는 몸 전체가 스파게티로 이루어졌다.

녹취록

SCP-13-SEEK

거기 안녕하신가.

레이그

넌 또 뭐하는 놈이야?

SCP-13-SEEK

자네 이름부터 좀 듣지.

레이그

제발, 그냥 쉽게 가자. 너 뭐하는 놈이냐고?

SCP-13-SEEK

서둘러서 더 얻을 건 없다네, 벗이여. 내 이름은 스파게티 존스. 이쪽은 내 애마인 리키 토니라네.

(SCP-13-SEEK와 그의 말이 동시에 고개를 숙인다.)

레이그

그래, 넌 뭐하고 지내지?

SCP-13-SEEK

바람이 이끄는 대로 갈 뿐.

레이그

아무것도 안 하신다 이거군.

SCP-13-SEEK

그리 여겨도 좋네. 평화로운 삶이야.

레이그

먹는 건 뭐 먹고?

SCP-13-SEEK

음식.

레이그

그니까 무슨 음식? 뭘 제일 좋아하는데?

SCP-13-SEEK

육즙이 가득한 맛있는 스테이크. 레어로 말일세.

레이그

그럼 소고기?

SCP-13-SEEK

소 말고 다른 동물로도 스테이크를 굽나?

레이그

어디 보자. 그럼 이 양반은 지금이 1870년인 줄 아는 스파게티 덩어리다 이거지.

SCP-13-SEEK

1870년이 아니라고?

레이그

네가 만약 나라고, 그리고 뭔가 굉장한 걸 찾아다니고 있었다고 쳐보자. 너라면 너 같은 놈을 찾고 기분이 좋을까 어떨까?

SCP-13-SEEK

나는 나라서 행복하다네. 썩 멋진 사내일뿐더러, 귀여운 친구 리키 토니도 있고 말이야. 난 만족하네. 문제라도 있나?

레이그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SCP-13-SEEK

정말 그리 생각하나, 파트너? 자넨 어때. 자기라서 행복한가?

레이그

별로 안 기쁘네. 십억 달러짜리 첨단 기술 결정체가 하필 너를 찾아내서 말이야.

SCP-13-SEEK

글쎄, 날 찾아 달라고 한 적은 없는 것 같군. 게다가 그건 내 질문에 대한 답도 아닐세.

레이그

너로는 부족해. 미안하게 됐네.

SCP-13-SEEK

벗이여, 비록 자네가 무례하게 굴긴 했지만, 즐거운 저녁 되길 바라네.

(SCP-13-SEEK와 그의 말은 동시에 고개를 숙이고는 레이그로부터 멀어진다.)

시커.22

입력 우주: 932,143,994개
매개변수: '생물' '케테르' '적대적' '로봇'

시커 발견

삼각 측량 결과 개체는 미국 뉴욕주 뉴욕시의 주택에 있다.

설명 요약

SCP-22-SEEK.

SCP-22-SEEK는 지성을 가진 엘모 간지럼인형 브랜드 장난감이다.

SCP-22-SEEK의 지성은 오로지 배 부분을 간지럽히면서 직접 대화를 시도할 때만 나타난다. SCP-22-SEEK는 가상 캐릭터 엘모처럼 말하기는 하지만, 캐릭터의 성격과는 유사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녹취록

레이그

너 꼬마들 먹고 그러니?

(레이그가 SCP-22-SEEK를 간지럽힌다.)

SCP-22-SEEK

하하하. 하하하. 아니. 뭐 잘못 먹기라도 했어?

레이그

좀 빡센 며칠을 보냈거든.

(레이그가 SCP-22-SEEK를 간지럽힌다.)

SCP-22-SEEK

하하하. 하하하. 엘모는 뭐하는 괴물이 꼬마를 잡아먹나 잘 모르겠어. 엘모는 어른만 먹어. 고기 훨씬 많아.

배경 정보

시메리안 박사가 레이그 이사관을 긴급회의에 불렀다.

«기록 시작»

레이그

제르, 까놓고 말해서, 네가 뭐라고 하든 난 열받을 거 같아.

시메리안

내가 얼마나 더 친절해져야 하는 건데. 나는 그냥 네가 걱정돼서,

레이그

그 지루하기 짝이 없던 저번 달 내내 나 혼자 이걸 다 해 왔어. 너는 내가 내 일을 하길 원했잖아? 난 지금 우리가 아직 격리하지 못한, 가장 위험한 변칙존재를 찾고 있어. 그리고 실제로 격리까지 하고 있고.

시메리안

변칙존재 25체를 찾기는 했지, 대부분 인육 애호가들이었지만.

레이그

이런 세상에.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너만큼은 기초과학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 거로 생각했는데! 제대로 작동시키려고 애쓰고 있다고. 네가 이 회의에 강제로 끌고 오지만 않았어도 남은 조정 작업 다 끝낼 판이었다니까.

시메리안

네가 찾고 싶은 게 정확히 뭔데? 신?

레이그

그게 최악의 경우는 아닐걸.

시메리안

그래서, 찾으면 어쩌게? 그것도 네가 손수 격리하게? 이 모든 상황이 어떻게 돼먹었는지 넌 좀 돌아볼 필요가 있어.

레이그

내 삶의 그야말로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순간에 와 있단 말이야.

시메리안

엔지니어들이랑 만나 봤어. 그 사람들 말로는, 탐지할 우주 개수가 10억이 넘어가면 아주, 무척이나 안 좋게 끝날 거라고 확신한다더라. 네 기지에 째깍이는 시한폭탄이 있는 꼴이야. 네가 지금 너랑 모두를 어떤 위험에 몰아넣고 있는지 알기나 해?

레이그

오늘만 지나면 끝이야. 변수도 몇 개 바꿨으니, 내가 찾아다니던 걸 정확히 토해낼 거라고. 이걸로 마지막이야, 정말로 말이지. 다음에 보자고!

(레이그 이사관이 방을 나간다.)

«기록 종료»

배경 정보

레이그 이사관이 모든 제322기지 인원을 회의로 소집해 시커가 다음으로 발견할 변칙존재를 보여주려 했다.

«기록 시작»

서론

레이그는 모든 제322기지 인원에게 시커 연구실로 모이라고 지시했다.

레이그

아마 왜 모두를 여기 불러모았나 궁금하겠지. 오늘 나는 내 최고 업적이 될 것을 발견해낸다. 이 끝내주는 기계가 오늘 찾는 변칙존재는 식인종 따위가 아니라 나의, 나아가 우리 모두의 걸작이 될 거다.

(박수 소리가 뜨문뜨문 들린다.)

레이그

정말 끝없는 강행군이었지. 도가 지나치지 않았냐 할 사람도 있을 테고. 나는 시커를 완벽하게 조정해내서…

코익스

저거 폭발하는 거 아닌가 몰라.

레이그

꼭 그렇게 초를 쳐야겠냐? 준비는 완벽해. 변수는 입력했고, 웜홀을 고려해 안정화 상태를 재조정하기까지 했다니까.

수석 엔지니어 하트웰

허어?

레이그

이걸 누르기만 하면—

(카메라 기록이 끊긴다.)

«기록 종료»

둘은 건물의 가장 어두운 장소로 나아간다. 금색 빛을 내던 구들은 사라지고, 대신 유리 파편을 닮은 작고 침침한 빛들이 떠다닌다.

SCP-8000

자네에게 이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네. 여기까지 치닫기 전에 내가 끄집어내왔긴 하네만, 자네가 내린 선택들의 종착점이 바로 여기야.

책장에 점점 빈 곳이 늘어난다.

SCP-8000

내가 지금 자네를 풀어주고 내버려둔다면, 이 모든 일이 현실이 되겠지. 내가 끼어들기 전에 있었던 그 회의 기억하나?

레이그

아니. 내 말은, 회의 자체가 있던 건 아는데, 정확히 뭘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

SCP-8000

내 지친 여행자들은 왜 항상 이런 일을 겪는지. 건망증 말일세.

SCP-8000과 레이그가 마지막 책장으로 다가간다. 책장 너머 공허로는 광대한 무(無)밖에 없다. 이 책장에는 책이 단 한 권 놓였다. 흰색이며, 뒤표지는 불타 사라진 듯하다.

SCP-8000

읽게.

걱정하는 친구와의 대화.

섣불렀던 상담.

프로젝트 제안.

감독관 평의회에게 고한 거짓.

한 남자의 뻔뻔한 고집, 그리고 자신의 문제는 오직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

애초에 닿을 수 없는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생명체 넷.

마지막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의 눈앞에서, 남자의 고집은 폭발했다.

방지할 수 있었던 실수.

레이그 이사관과 SCP-8000이 출입이 통제된 강기슭에 있는 커다란 구덩이 안에 나타난다. 주변에는 수정 조각, 그리고 콘크리트, 철근, 유리 덩어리가 흩어져 있다. 공기는 뜨겁고 유황 냄새가 난다. 주변을 둘러보던 레이그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SCP-8000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겠나?

레이그

여긴…

SCP-8000

알다마다. 자네는 알고 있어.

[…]

레이그

뭐가 벌어진 거야?

SCP-8000

시커 머신이 멜트다운을 일으켰다네, 폴 선생.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지. 웜홀이란 본디 변덕이 심하다네. 난들 모르겠나. 굉장히 불안정하지만, 그래도 자네가 만든 기계는 꽤 잘 버텨낼 만큼은 견고했어. 그런데도 뭔가에 사로잡힌 듯 영광을 좇던 끝에, 그 한계치를 자네는 넘겨버린 게야. 자네가 입력한 매개변수 조합은 그 어떤 알려진 우주에도 존재하지 않았네. 너무 구체적이었어. 너무 불가능했지. 그래서… 쩍 갈라진 게야.

레이그가 서성거리다가 넝마가 된 옷과 실험실 장비를 발견한다.

SCP-8000

자네 기지는 사라졌네.

레이그가 원래 자기 책상의 일부던 나뭇조각을 마주한다.

SCP-8000

자네 사람들도.

레이그는 진흙을 파헤치고 자기의 제322기지 키카드에 달렸던 끈을 발견한다.

SCP-8000

자네도.

(정적.)

SCP-8000

폴 선생?

레이그

이게 일어날 일이라 했지. 그래서, 일어났어?

SCP-8000

자네가 날 만나지 못한 시간선에서는 일어났지.

레이그

그걸 네가 멈췄고?

SCP-8000

난 아무것도 멈추지 않았네, 폴 선생. 오직 이 비극이야말로 나의 관심을 자네에게로 돌린 계기였다네. 나는 매일같이 죽음과 파괴를 지켜보지. 그 내막엔 대개 결정을 내린 이들이 있고, 그들이 결정에 도달한 내력이 있고, 그 내력을 만든 까닭이 있고, 그 까닭을 들여다보면 때로는 이해할 수 있지. 그런데 이미 얘기했듯 자네는 좀 특이한 사례야. 자네 내력에서도 나는 이 모든 걸 설명해줄 수 있을, 기폭제가 된 하나의 사건을 찾으려 했지. 하지만 그런 건 없었네. 자네가 할 수 있었던 더 나은 판단들, 남들이 자네에게 준 조언들, 여기에 이르기까지 매 걸음마다 자네는 그것들을 무시하고 지나쳤네. 자네 안의 최악의 기질이 번지다 못해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되도록 내버려뒀고, 그 결과가 이걸세.

레이그

왜? 바로잡게 해줘, 제발! 내가 바로잡을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진짜라니까. 그럴 기회는 줄 수 있잖아, 그냥, 그냥 저기로 되돌려보내 줘!

SCP-8000

어쩌면, 어쩌면 멈춰볼 수도 있겠다 싶더군. 자네가 천길 낭떠러지로 뛰어드는 순간 개입해서 절벽 끄트머리 코앞으로 자네를 되돌려놓을 수 있나 보는 게야. 시메리안이 자네의 마지막 생명줄이었으이. 거기서 시작해야 온당하겠다고 느꼈지.

레이그

맙소사, 이게 진짜일 리 없어. 이런 일이 벌어질 리가 없다고.

SCP-8000

나는 노력했네, 폴 선생. 믿어주게, 하지만 그만큼 자네가 완고한 걸 어쩌나. 내가 보여주려 했던 어떤 것도 자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네.

레이그

이해했어. 다 이해했다고. 난 꼴랑 거울 하나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개자식이야. 난 엉망이라고. 다 끝난 판에 이걸 깨달아서 뭐 어쩔 건데? 이게 나란 놈인걸. 난 절대 만족이란 걸 못할 거고, 결국 이렇게 굴러갈 거야.

SCP-8000

그 사고방식이 자넬 여기까지 몰아넣은 걸세.

레이그

나 혼자선 바로잡을 수가 없어.

SCP-8000

자네 혼자 이걸 바로잡을 수 있다네.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본 것을 자네도 직시하게. 자넨 성공을 얻었어. 다만 거기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할 뿐이야.

레이그

어떻게? 내가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단 건데? 너도 다 봤잖아!

SCP-8000

내가 본 건 자신을 믿지 않던 꼬마가, 아무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까 봐 늘 불안에 떠는 남자로 자라는 모습이었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지금 자네를 좀 보게.

SCP-8000이 모래에 지느러미로 배트맨 로고를 그린다. 레이그가 눈물을 글썽인다.

SCP-8000

잔혹하게 굴려고 이러는 게 아닐세, 폴 선생. 이 장소에서 벗어나도록 하지.

SCP-8000이 책을 덮는다. 둘은 도서관으로 돌아온다. 분위기는 더 고요하고, 빛 파편은 소멸하여 둘은 거의 완벽히 어두운 공간에 남아 있다.

레이그

나 자신이 맘에 들지 않아.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

책장이 덜거덕거린다.

SCP-8000

알고 있네.

레이그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놔둘 순 없어. 그럴 순 없다고. 이건… 난 이러려고 태어난 게 아니란 말이야.

SCP-8000

누군들 그러려고 태어났겠나. 하지만 누구나 결국 길을 찾는 법이라네. 자네도 그랬지.

레이그

이 모든 노력과 시간을 무위로 돌릴 순 없어. 내가 여태 해온 모든 것을 허허벌판의 구덩이로 만들 순 없다고. 내가 저질러둔 문제들 보고 실실 웃고 자빠진 허수아비가 될 순 없단 말이야.

SCP-8000

자네 자신을 믿나?

레이그

세상에, 나 대체 왜 이러지?

책장들이 격하게 덜컹거린다. 흔들거리던 책들이 바닥으로 쏟아지자, 후두둑 떨어지다 세게 부딪히는 소리가 건물 구석까지 메아리친다.

SCP-8000

자네에게 문제가 있을지라도, 이 모든 걸 바로잡을 힘도 갖고 있네.

레이그

맙소사. 난 저 안에서 인생을 살고 친구를 사귀었어. 내가 여태 일해온 모든 게 저 건물 안에 있었어. 저게 내 성공이었어. 이게 내 성공이라고. 내가 뭘 이뤘냐는 밀어둔 채 그저 거울 속의 나를 직면하질 못해서 내내 징징거려왔어.

둘 아래의 지면이 우르릉거린다. 레이그 발밑의 바닥재가 큰 힘을 받은 듯 갈라진다. 뒤에서 점점 더 많은 책이 바닥에 떨어지며 우박 같은 소리를 낸다. 책장을 덮은 덩굴과 나뭇잎들이 태풍에 휘말린 듯 나부낀다.

SCP-8000

자네 자신을 믿나?

레이그

더 이상 이렇게 살 순 없어. 족히 마뜩잖다고만 느끼는 삶은 넌더리가 났어. 남의 행복에 기뻐해 주긴커녕 배 앓는 것도 이젠 싫어. 난 충분히 괜찮은 놈이야. 언제나 충분히 괜찮은 놈이었어.

갑자기, 레이그 뒤에 있는 텅 빈 책장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다. 우르릉대는 소리도 멈춘다. 책들이 둥실 떠올라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나뭇잎도 원래대로 돌아간다. 레이그 발밑의 균열은 여전하다.

SCP-8000

폴 선생. 자네 자신을 믿나?

레이그

난 나를 믿어. 난 이걸 바로잡을 수 있어.

SCP-8000

바로 그거야.

텅 비었던 책장들은 이젠 온갖 크기와 형태의 흰 책 수백 권으로 가득하다. 레이그는 책들을 경이에 차 바라본다.

레이그

이건 뭐야?

SCP-8000

아직 쓰이지 않은 기억들. 자네 삶은 채 피기도 전에 종언을 고할 뻔했지만 이젠 아닐세. 자네의 집으로, 친구들 곁으로, 두고 온 일터로 돌아가야지. 자네만의 성공을 쟁취하고 이 책들을 채워넣어야 쓰지 않겠나.

레이그

모든 건 이미 정해진 거야?

SCP-8000

아니라네, 폴 선생. 저 책들은 백지야. 자네가 내릴 선택이 쓰이고 채워질 빈 책들이라네. 자네가 돌아가서 내가 건넨 모든 조언과 지식을 싹 무시한다면 이 책들은 다시 사라지겠지. 아니면, 돌아가서 내가 마저 읽을 이야기를 더 만들어낼 수도 있고. 모두 자네에게 달린 일일세.

회수 문서 8000.9~10
2024년 3월 22일

배경정보

시메리안 박사가 레이그 이사관을 긴급회의에 불렀다.

«기록 시작»

레이그

제르, 까놓고 말해서, 네가 뭐라- 이런 미친. 이런 세상에!

(레이그 이사관이 시메리안 박사 반대편에 앉는다.)

시메리안

드디어 미쳤군.

레이그

아마 그러겠지! 세상에 정말 다행이야.

시메리안

이봐 폴, 내가 얼마나 더 친절해져야 하는 건데. 나는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럴 뿐이야. 내가 지난 한 달 동안 읽고 들은 바로는 네가 이 직위에 맞지 않는 것 같아. 이 프로젝트는 째깍이는 시한 폭탄이야. 난 이 기지에 있는 모두의 안전이 걱정돼. 무엇보다 네 안전이 걱정돼.

레이그

나도 알아. 네 말이 맞아.

시메리안

진심이야?

레이그

[…] 어.

시메리안

엄. 그래. 내가 느끼기엔 너 지금 혼자 입 꾹 다물고 고통스러워 하는 것처럼 보이거든. 제발, 마지막으로 부탁하는데 대체 뭔 일인지 좀 알려주라.

레이그

내가…

[…]

레이그

내가 네 말을 들었어야 했어. 날 도우려 했던 거 알아.

시메리안

아직도 도우려 해.

레이그

미안해. 밀어내려고 했던 거. 너도, 남들 모두도. 질투와 불안의 굴레에 평생을 갇혀 있었어. 이제라도 빠져나올 수 있던 건 전부 날 진심으로 걱정해주던 사람들 덕분이야.

시메리안

음, 이런 답변을 기대했다고는 절대 말 못하겠는데.

레이그

내가 무슨 일을 겪고 왔는지 짐작도 못 할 거야. 그러니까 무슨 물범이 있었는데… 그러니까…

(시메리안이 눈썹을 치켜올린다.)

레이그

나 미친 거 아니야. 그러니까 이 물범이 있었는데, 내가 도서관에 들어가서…

시메리안

사람 좀 불러줄까?

레이그

알 게 뭐야. 맘대로 해.

시메리안

나 지금 되게 혼란스럽걸랑.

레이그

넌 몇 주 전에 나한테 날 도우려 한다고 말했지.

시메리안

계속 그런대도.

레이그

지금 내 모든 문제는 내가 001 제안 건을 끝낸 다음부터 시작됐어.

시메리안

큰 성과잖아. 듣기로는 너도 꽤나 흡족해했고.

레이그

그래, 흡족했지. 더없는 영광이었어. 전부 끝마치고 등재까지 했는데, 그런데… 그냥 그게 끝이었어. 동료들도 잘 봐줬고, 평의회도 승인 도장을 찍어 줬지. 그걸 위해서 난 그 가시밭길을 헤쳐간 거야. 노고는 보상을 받았고. 등재 버튼을 누른 순간 세상 꼭대기에 올라간 것만 같았어. 그리고… 그게 다였어. 끝이더라. 그러고는 난 현실로 돌아갔고, 돌아간 그곳엔… 그냥 늘상 똑같이 굴러가는 잡무뿐이었어.

시메리안

맡는 일마다 대형 프로젝트일 순 없는 거 알잖아, 그치?

레이그

그게… 그니까, 이젠 알지. 그땐 거기부터 쭉 내리막길뿐이리라는 기분이 들었거든.

시메리안

그도 그랬겠지. 사실 그냥 네 원래 업무량으로 돌아가고 있었을 뿐이지만, 그게 갑작스런 충격이 될 수도 있는 거야.

레이그

내 연구 인생의 정점이 이사관 재직 8년 차에 와버린 것 같았어. 8년 차에! 두려움이 온몸을 휘감았고 떨쳐낼 수가 없더라. 재단에는 죽지 않는 사람들마저 있는데, 나는 다신 돌아오지 않을 정점을 쫓으면서 여생을, 어쩌면 거기서 더 연장해서 살아가야 한다니, 상상도 하기 싫었어. 네가 '대형 프로젝트'라고 한 게 뭐까지 말하는 건지는 몰라도, 001 제안 등재 쯤 되는 건 새 기준과 기대를 만들고, 그걸 따라갈 수가 없었어. 아마 영영 못 따라가겠지.

시메리안

그리고 그건…

레이그

모든 게 일일 잡무로밖에 안 느껴지더라. 그런 일들이 예전엔 더 큰 성취로 나아가는 디딤돌이었는데, 이젠 그것만 이어지는 도돌이표가 되어버렸어. 더이상 내가 그 자리에 없다고 끝없이 속삭이면서 말이야. 책임질 것들이 돌아오면서, 그 대단한 성과는 그냥 잠깐 숨 돌린 것에 불과했다고 상기시켰지. 감당이 안 되더라.

시메리안

이해가 간다. 그런 감정을 겪는 게 너뿐이라 하면 거짓말이겠지.

레이그

그렇지. 근데 그때는 그런 생각이 전혀 안 들더라.

시메리안

그럴 만하지.

레이그

내가 뭘 깨달았는지 알아?

시메리안

글쎄.

레이그

그 제안은 제안이었던 적이 없어. 나는 아무것도 해결한 게 없어. 그 총체적 난국 속에서 내가 뭐라도 제대로 된 걸 뽑아낼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모두가 내 뒤를 받쳐주고 또 내가 뭔가 해내고 있다고 믿어줬기 때문이야. 나랑 같이 격리 절차를 붙들고 씨름한 모두들. 내가 모가지 당할 걱정에 빠졌을 때 진정시켜준 모두들. 그리고 내가 그 난국 속에서 무시했던 모두들. 더 빨리 알아챘어야 했는데.

시메리안

이제 바로잡을 기회가 왔잖아.

레이그

나도 알아. 내가 그 감정을 완전히 떨쳐낼 수 없으리란 것도 알고. 평생을 안고 살아왔고, 때론 그 덕분에 감히 상상도 못했을 경지에 오를 수도 있었어. 그치만 그게 내 자멸을 몰고 오는 건 눈치 못 챘어. 잃어버린 관계, 낭비한 시간, 뭣도 더 나아지지 않으리란 느낌… 이젠 감당할 수 있어. 처음부터 계속 그래 왔지만 그게 날 파멸시킨 건 이게 처음이야.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내가 그러게 두지 않을 거니까.

시메리안

폴. 우리가 매양 들이미는 온갖 규정이나 헛소리는 싹 갖다 치우고, 제일 중요한 건 이거야. 네 기준은 네가 만드는 거라고.

레이그

뼈저리게 알아. 다시 그 말해줄 필요는 없을 거야.

«기록 종료»

배경 정보

레이그 이사관이 모든 제322기지 인원을 회의로 소집했다.

«기록 시작»

서론

레이그는 모든 제322기지 인원에게 시커 연구실로 모이라고 지시했다.

레이그

내가 개자식같이 굴었지, 그래.

SCP-5595

콜록콜록. 여전히 그렇다. 콜록콜록.

레이그

고맙다. 내가 다 망쳤어. 그것도 제대로 망쳤지. 미안하다. 다들 최선을 다해 날 도왔던 거 알고 있다. 근데 난 나만의 세상에 갇혀서는 단지 그럴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남의 탓으로 돌렸지. 몹쓸 리더였어.

코익스

폴, 그렇게 말해줘서 정말 정말 고마운데, 일단 저 장난 아니게 불안정한 기계부터 어째야 할 거 같다.

레이그

알고 있다. 이게 대체 얼마나 불안정한지 꿈에도 모를걸.

(인원 간 웅성이는 소리가 들린다.)

레이그

다 괜찮을 거다. 걱정하지 마라. 그러니까 이 물범이… 아니다 넘어가자. 원래도 이상했는데 더 맛 간 것처럼 보이겠네. 이제, 다 같이 이걸 바로잡자고.

수석 엔지니어 하트웰

우주 한계치를 최소치까지 내렸다가 재기동해야 합니다. 그러면 전부 다시 안정될 거예요.

레이그

해보자고.

(레이그가 시커의 입력 패널을 작동시킨다. 스캔할 우주 수를 1로 내린다.)

레이그

이렇게 말인가?

수석 엔지니어 하트웰

네, 이제 재가동하십쇼.

시커.25

입력 우주: 1
매개변수: 없음

시커 발견

삼각 측량 결과 변칙 개체는 제322기지 상공에 있다.

코익스

뭔가가 있는데.

레이그

저거 맞네.

«기록 종료»

특수 격리 절차

SCP-8000.

SCP-8000은 현재 격리되지 않았다.

설명

SCP-8000은 길쭉한 점박이물범(Phoca vitulina)을 닮은 미확인 독립체로서 길이는 75미터에서 150미터 사이로 추정된다. SCP-8000이 지닌 정확한 변칙성은 알려지지 않았다. 목격자 증언에 의하면 SCP-8000은 알 수 없는 수단으로 스스로 비행할 수 있다.

SCP-8000이 어디서 기원했는지는 알 수 없는데, 발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독립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SCP-8000을 마지막으로 식별한 위치에 도착한 재단 항공기가 발견한 것은 외부차원과 연결되었을지 모를 조그만 균열이 현재 현실에서 조금씩 닫혀 가는 모습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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